극락정토는 각자가 마련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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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곁의 부처 - 장휘옥
1996년 11월 177호
앞에서 \'깨달으면 이 세상이 그대로 정토\'라는 설명을 했다. 그런데 정토 경전인 「무량수경」에는 아미타불은 서쪽으로 십만억 불국토 지난 곳에 있는 극락세계에서 현재도 설법하고 계시며, 모든 중생은 아미타불을 믿고 신앙하면 구제를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을 설하고 있다.
불교는 자각의 종교다. 그러므로 기독교나 마호메트교 등에 보이는 것과 같은 유일 절대의 신도 없고, 신의 종으로서 신전에 엎드려 용서를 구할 일도 없다. 오히려 의미는 조금 다르지만, 형식에서 보면 불교에는 \"부처란 뭐하는 것이냐, 경전은 똥 닦는 종이와 같다\"라는 표현까지 사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량수경」과 같이 하나의 인격적인 아미타불을 신앙한다는 것은 특이한 것으로서, 이러한 타력 신앙은 원시불교경전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대승경전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진리를 깨달아 부처가 되는 것, 다른 말로 바꾸면 진리(法)와 인간 (人)과의 대결이 일반불교의 입장이다. 그러나 미망의 인간이 직접 진리와 대결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고 힘들다. 그래서「무량수경」에서는 이 진리와 인간 사이에 아미타불의 정토라는 것을 개입시키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무량수경」에서는 아미타불의 전신인 법장 비구가 직접 진리와 대결해서 아미타불이 되어 자신이 건립한 정토를 중생을 위해 제공함으로써, 진리와 인간의 대결을 좀더 쉽게 해 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정토교 에서는 진리와 인간이 직접 대결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대결하는 장소를 정토에서 구하여, 정토에 왕생한 뒤에 그 곳에서 진리와 대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토는 진리와 인간의 대결에 있어서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되어 있으며, 진리를 깨닫거나 보살행을 닦는 것도 아무런 장애를 받지 않을 뿐 아니라, 부처님의 가피가 있는 곳이기 때문에 왕생자에게 있어서 \'왕생 즉 성불\'을 약속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아미타불의 정토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세계는 그 사람의 깨달은 정도에 따라 전개된다. 깨달은 자의 눈에는 이 세상은 깨달은 세계 정토로 보이고, 중생의 눈에는 사바세계로, 동물의 눈에는 동물의 세계로 보이는 것이다.
예를들면, 지계持戒 견고한 오랜 수행은 금강보좌를 감득하게 되는 데, 그 능력을 감득한 자는 앉으려고 할 때 반드시 금강보좌를 앉을 자리에 느끼게 되는 것이다. 금강보좌가 먼저 있어서 그 곳에 가서 앉는 것이 아니라, 수행의 결과 저절로 마련되는 것이다.
「관무량수경」에는 \"그대들의 마음에 부처를 생각하면 그 마음이 바로 서른두 가지 상의 뛰어난 모습이 되고 여든 가지의 특징을 가지게 되느니라. 그래서 이 마음으로 부처를 이루고, 또한 이 마음이 바로 부처니라. 모든 부처님의 위없는 바른 지혜는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니,
일심으로 골똘히 생각을 모아 아미타불을 관해야 하느니라\" 고 설하고 있다. 아미타불과 정토는 부처님의 실재實在의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으므로, 그 모습을 인간이 생각을 모아 관할때에는 인간의 마음에 인간의 실재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결국 아미타불을 볼 수 있느야 없느냐 하는 것은, 자신이 아미타불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게 수행을 하였느냐 하지 않았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무량수경」에서는 위제희 부인이 부처님께 극락세계를 보여달라고 했을 때, \"부인은 마땅히 마음을 가다듬어 청정한 업으로 이루어진 저 극락세계를 자세히 관찰해 보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여기서 \'청정한 업\' 이란 아미타불의 전신인 법장 비구가 정토를 건립하려고 닦은 청정한 업을 말하는 것으로서, 결국 극락세계의 건립은 자신의 업을 청정하게 닦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법장 비구가 서방정토를 장엄하려고 토목공사를 하거나 토지를 확장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청정한 업을 닦아 극락정토를 건립한 것이다.
그러면 왜 정토경전에는 , 아미타불은 여기서 서쪽으로 십만억 불국토를 지난 곳에 있는 극락세계에서 현재도 설법하고 계신다고 하였을까? 이것에 대해 중국정토교의 대성자인 선도는, \"말세의 오탁악세의 중생들은 인간의 실재 모습과 똑같은 모습으로 서방에 이러 이러한 부처님이 계신다\"고 말해도 이것을 관觀할 능력이 없는데, 하물며 모습을 여읜 모습을 관하라고 하는 것은 신통술이 없는 사람에게 공중에 머물러 집을 지으라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것은 한마디로 극락정토는 부처의 눈으로 보면 실재하는 것이지만, 중생은 이것을 볼 능력이 없기 때문에 믿지 않으므로, 어쩔 수 없이 방편으로 극락은 서방에 있고 아미타불은 현재 그 곳에서 설법하고 계신 다고 설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는 이 현실 세계의 이면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진실한 세계인 정토가 존재하고 있다. 이것은 육안肉眼이 아니라 마음의 눈인 심안心眼이라야만 볼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것 외에는 믿을 수 없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정토를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이 열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량수경」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부처님께서 미래의 중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간곡히 부탁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출현함을 만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니라. 또 한 여러 부처님의 경전을 얻는 것도 어렵고 설법을 듣는 것도 어려우니라. 그리고 보살행의 위대한 법인 육바라밀을 듣는 것도 또한 어려우며, 선지식을 만나서 법문을 듣고 능히 수행하는 것도 역시 어려운 일이니라. 더구나 이 「 무량수경」의 진리를 듣고 환의심으로 믿고 지니어 기억함은 참으로 어려운 가운데서도 더욱 어려운 일로서, 이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느니라. 그러므로 나는「무량수경」의 법문을 진리 그대로 이와 같이 가르치는 것이니, 그대들은 마땅히 믿고 의지하여 가르침과 같이 수행해야 하느니라.
불법 만나기 어렵고, 만나더라도 또한 배우기 어렵다는 말은 익히 들어왔다. 불법을 만날 수 있다는 인연만으로도 우리는 숙세의 공덕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쓸데없이 의심하지 말고 믿어야 한다. 그리고 매일의 생활 속에서 실천해야 한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남이 대신 먹어 줄 수 없고, 아무리 잠이 와도 남이 대신 잘 수는 없다. 수행도 마찬가지다. 아미타불께 귀의하여 그 가르침을 실천할 때, 그리하여 자신의 업을 하나 하나 벗겨갈 때 아미타부처님의 모습은 조금씩 드러나고, 극락정토도 차츰 실현되어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