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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림의 기본을 다시 새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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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리포트 - 편집실 1996년 11월 177호
사과를 표하며

먼저 총림에서 발생한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 독자 제헌께 사과의 말씀부터 드리고자 한다.
해인사는 무엇보다 호국의 일념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판각한 대장경을 보관하는 법보 사찰이다. 이것은 지극히 보편적인 사실이기 때문에 쉽게 법보 사찰이지 하고 넘어갈 수 있으나 다시 그 의미를 되새겨 보면 대단히 중요한 가르침이 그 속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목판에 새겨진 경전의 가르침은 새삼 거론하지 않더라도 익히 알고 있듯이 그 목판에 새겨진 엄청난 글은 마치 한 사람이 새긴 듯하고 오랜 세월 온갖 자연적 재난을 겪으면서도 훼손된 일 없이 보관되어 왔다. 마치 인간의 힘이 아닌 그 어떤 신비의 힘이 작용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싶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한 신비로운 일 자체는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지극한 정성으로 원력을 세운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것이지를 뼈저리게 깨닫게 한다. 바로 그렇게 때문에 팔만대장경과 판전이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인정된 것이다.
해인사가 단순히 형식적인 이름으로서의 법보 사찰이 될 수 없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선조의 지극한 발심과 원력이 무언 중에 후학들에게 이어진 곳이기에 해인총림 그 이름만으로는 역사의 전통이 담겨 있는 것이며 여기에 있는 총림의 대중은 누구보다 그 의미를 늘 화두처럼 이고 살아야 한다.
그런데 최근 총림의 전통이 무너지고 대중 상호간에 반목과 갈등이 집단적 대립으로 나타나서 원로 대덕 스님과 사부대중에게 실망과 근심을 안겨 주었으니 사건의 발달과 그 과정이 어떻든 간에 독자 제헌을 비롯하여 모들 불들에게 사과의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는 한편 우리는 이번 해인총림에서 일어난 일들을 꼼꼼이 짚어보며 다시는 다른 곳도 아닌 이 해인총림에서 유사한 사건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자 한다.
무릇 \'후회란 아무리 빨리 해도 늦다\' 라는 말처럼 지금 총림을 온통 흐리게 한 사건도 이렇게 파장이 크기 전에 대중이 합심하여 제어코자 했으면 이렇듯 파장이 오래 멀리 가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어찌 보면 총림의 전통에 흠집이 나기 시작하던 무렵에 이왕 불거질 조짐이 있으니 좀더 곪겨 완전히 뿌리를 뽑아야 한다라는, 말하자면 가는 데까지 가고 보자라는 무책임성도 있었다.
해인총림에 흐린 물이 번지기 시작한 것은 전 방장 성철 큰스님이 열반한 이후 총림의 전통인 원융 분위기가 다소 헤이해지면서였던 것 같다. 그런데다 설상가상으로 가야 개발의 해인골프장 건설이 본격화되면서 해인사의 심상치 않은 바람이 거칠어졌다.


무리한 독선
자칫 해인총림의 전통이 \'나눠먹기\' 라고 혹평할지 모르지만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자 했던 정화 이후 해인총림의 방장은 총림을 상징하는 어른으로 모시고 산중의 살림은 방장의 권속이 겸임하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일종의 관례로 존중되는 이 전통으로 현대에 들어 한국 불교가 겪었던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요지부동으로 수행과 면학의 분위기를 이어올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원융화합의 전통이 혜암 큰스님을 방장으로 모신 이후 다소 헤이해지는 조짐을 보였다. 9월 26일자로 발표된 \"해인총림 산중중진회의 및 수습대책위원회 입장\" 제하의 성명서에는 이런 조짐의 발단이 어디에 있는지를 지적하고 있다.
\"그간 해인총림은 성철 큰스님께서 제방의 납자들을 제접하실 때까지만 해도 한국교단의 모범을 보여왔으며 산중 공의에 의한 승가 전통을 최후까지 답지하여 왔던 귀의처였으나 큰스님 열반 이후 해인총림은 독단적이고 독선적인 총림운영으로 말미암아 \'원융살림\'이 파괴되어지고 급기야 사부대중의 화합마저 깨어지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중략). 이번에 일어난 해인사 사태는 해인사 방장 스님이신 혜암 큰스님을 그 문도들이 올바로 보필하지 못하고, 큰스님의 위덕을 빌미삼아 문도 몇몇 승려들이 해인총림을 독단과 독선으로 전횡하는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아마 이 성명서가 지적하고 있는 것은 혜암 큰스님을 방장으로 모신 뒤에 해인사의 주요 소임을 큰스님의 시봉들이 차지하였고 해인사의 관련부서, 이를테면 장경 연구소 등의 소임도 뚜렷한 명분도 없이 인사 조치했던 것 등등을 꼬집고 있는 것 같다. 그러던 차에 강원과 선원도 납득할 수 없는 명분으로 문을 닫는 상황까지 생겼으니 총림으로서의 전통과 기능이 원천적으로 무시되고 마비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지경에까지 이른 책임을 반드시 물어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해인사의 대중이 별도의 결사를 조직하고 그 대중결사의 공의를 통해 총림에 분란을 일으킨 책임자를 \'산문출송\'이라는, 속세의 규범으로 의절 조치까지 감행한 것은 총림의 기본 질서 자체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는 현실에서 부득이한 조치였다. 게다가 이들 책임자는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의 존립과 보존에 더없는 위협을 가 할 것이 명백한 가야산 해인골프장의 건설에 석연치 않은 처신을 보임으로써 과연 이들이 무언가 구린데가 있는 것이 아니냐 하는 의혹마저 갖게 하여 대중의 감정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모두 자자의 정신으로
이번 해인의 진통을 원만히 해결하기 위한 대중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결의로 책임자를 \'산문출송\'이라는 단계에까지 이르렀음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아울러 책임자에 대한 문책이 있은 뒤 혜암 큰스님께서 총림의 대표인 방장직을 사퇴하시게 된 것 역시 경위야 어떻든간에 해인총림의 큰 상처가 아닐 수 없다.
앞서의 성명서에는 이런 글도 있었다.
\"(주지 이하 7직의 완전한 퇴진을 부르짖게 된) 이것은 종무행정을 담당했던 소임자들을 배척하고자 함이 아니라, 그 책임을 묻고 해인사의 승가 전통과 \'산중공의\' 의 정신을 부활시켜 총림으로서의 제자리에 회귀시키고자 하는 당위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 책임자가 산문 출송을 당한 뒤에도 계속 자신이 종단의 행정 절차상 하자가 없는 주지라는 점을 내세워 분란을 일으키고 문제의 불씨를 다시 지피려고 하는 처사에 대해 과연 그들이 문책을 당하기 이전 해인총림의 식구였나를 의심하게 된다. 그들은 오죽하여 은사이신 혜암 큰스님께서 담화문까지 내시게 되었는지를 심사숙고하여 다시는 문중이나 종단에 불미스러운 일이 자신들로 하여금 일어나지 않도록 자숙하길 바란다.
한편 우리는 그들에게 책임을 묻는 과정에서 참으로 해인의 전통과 정신을 바르게 지켰는지를 자자와 포살의 정신으로 되돌아보아야겠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에게 자신들의 죄과를 깨닫고 뉘우치게 하는데 있어 우리들 스스로 반성할 점은 무엇이고 제도적인 미비점은 없었는지를 궁리해봐야 한다.
무릇 중생이란 무엇인가?
눈앞의 이익을 쫓다가 대의를 망치는 어리석음이며 치미는 화로 인해 감정을 추스리지 못하는 어리석음의 마음을 일컫는다. 남에게 경책을 주면서 그 대상에게 경책의 방편을 잘못 써 오히려 더 그릇된 마음을 일으키게 하여서는 안 된다. 물을 흐린 미꾸라지를 잡으려고 물 자체까지 못쓰게 만들어 모두 함께 더럽혀지는 일 또한 경계할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총림의 정신을 저버린 자들에게 경책을 주면서 그가 과거에 이런 저런 일로 세속법에 의한 처벌을 받은 경력이 있으며 어느 사찰의 주지로 있을 당시 무슨 못된 짓을 저질러 쫓겨 난 사람이다는 전력을 폭로하였다. 그 방법 또한 공식적인 서한으로 작성하여 언론기관에 돌렸다. 이왕 저질러진 물이니 모두 까발리고 보자 라는 심산이었을까. 부도덕성을 부각하기 위해 그리고 그들이 다시는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하려는 의도가 있다손 치더라도 다른 방법보다 더 효과적이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겠다.
얘도 쟤도 잘못했다는 식의 양비론적 지적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주기 바란다.
우리가 어떤 결사를 함에 있어 늘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도덕적 명분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승가의 전통을 거론하면서 위계와 질서를 무시한다든가 화합과 원융을 말하면서 갈등과 반목을 고조케 한다든가 여법한 과정을 완전히 무시하여 특수한 상황이 일반화되는 경우가 없어야 한다. 그것을 무시하게 되면 정당한 일도 부당한 일로 매도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번 해인총림의 일은 해인을 일구었던 역대의 선조들과 이 곳을 거쳐가신 모든 분들께, 그리고 오늘 이 곳을 지켜보고 계신 사부대중 여러분께 법보 종찰로서의 이름을 다하지 못하여 죄스럽기만 하다. 이번 일이 총림의 기본을 다시 새기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점을 약속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