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발승 따라 들어온 산문, 운경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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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 박원자
1996년 11월 177호
열 두 살 적에 처음 나와 본 서산읍내 장 구경은 참으로 볼만한 게 많았다. 길가에 만물상처럼 늘어놓은 갖가지 물건들을 구경하며 북적거리는 사람들 속에 있노라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레 만에 한번씩 서는 읍내 장날에 언젠가 한번 나와보리라 벼르고 있다가 동네에 들어온 장꾼을 따라 이십여 리를 걸어 장터에 나온 참이었다. 장터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같이 나온 장꾼이 \'날이 어두워지기 전 이 곳에서 만나 같이 들어가자\'고 했으나 열 두 살 난 어린 소년의 호기심으로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며 구경하느라 설핏 해가 지는 줄도 몰랐다.
장꾼을 놓쳐버리고 어둑어둑해진 큰길을 따라 집으로 가고 있노라니 다리는 아프고 배는 고팠다. 시오 리 길은 족히 걸었을까. 날은 이미 어두워져 컴컴해졌고 밤길을 혼자 걸을 생각을 하니 갑자기 무서운 생각마저 들어 큰길가에 있는 집 마루에 털썩 주저앉으니, 문이 열리며 할아버지 한 분이 물었다. \'웬 녀석의 한숨 소리가 그리 깊으냐.\'
사정 얘기를 하니 할아버지는 선선히 하루 묵어갈 것을 허락하였다.
그 집에서 하루를 묵고 아침밥까지 얻어먹고 집으로 부지런히 걷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말을 건넸다. \"앞서 가는 놈은 어디로 가는 길인고.\"
뒤돌아보니 바랑을 걸머진 탁발승이었다. 운산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자 \"같이 가면 되겠구나\" 했다. 함께 길을 걸으며 가는데 그이가 집집에 들러 탁발을 했다. 자연스레 나도 따라 들어갔다 나오고 하다보니 하루 해가 저물었다. 어쩔 수 없이 허름한 여인숙에 들러 하룻밤을 자게 되었는데, 비로소 탁발승이 내 신상에 대해 물었다. 부모님은 안 계시고 형님 댁에 얹혀 있다는 말을 듣자 탁발승이 그랬다. \'나 따라 절에 가서 살면 되겠구나.\'
참으로 이상했다. 집이 서산 개심사 밑 동네에 있어 구경 삼아 몇 번 절에 올라가 본 것 말고는 불교에 대해선 물론, 탁발승도 \'동냥하러 다니는 이\' 쯤으로 알던 시골뜨기였는데도 그이의 \'절에 가서 살자\' 라는 말이 그렇게 구수하게 들렸으니 말이다.
이것 저것 생각하지 않고 \'그러마\' 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채 일 년이 안 되어 밤마다 그 분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슴 한 켠이 늘 저리고 뻐근할 때였다.
아마도 어머니의 때이른 죽음이 나를 출가사문의 길로 들어서게 했을 게다. 집에서 따뜻한 밥을 지어 놓고 장구경 나가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동구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어머니가 계셨다면 내가 그렇듯 선선히 \'그러마\' 했을까.
집에 들러 형님에게 절로 가겠다는 말 한마디 남기지 않은 채 탁발을 하며 예산이니 당진 등지를 여러 달 다녔다. 민가에 들러 탁발을 해 등에 걸머지고 큰길을 지나 들길이며 산길들을 걸었는데 하루 종일 말없이 걷기만 할 때도 있었다.
별 말 없이 휘적휘적 큰 걸음으로 걷고 있는 탁발승을 보면 떠다니는 구름 같기도 했고 흐르는 물 같기도 했다. 그이의 너른 등판을 보며 나는 그때 생각했다. \'아하 그렇구나, 중이란 저렇게 동냥하며 오래도록 걷는 사람이구나\' 그렇게, 말없이 하루 종일 걸어도 입이 궁금한 줄 몰랐고, 같은 또래 아이들과 함께 떠들고 지내는 것보다 그렇게 걷고 탁발하는 것이 더 푸근했는데, 침묵의 심연에 흐르는 넉넉함 같은 것을 조금쯤은 맛본 것 같다. 그런 나를 보고 탁발승이 \'그놈 참\' 하며 한번쯤 대견한 웃음을 지었다.
아마도 몇 달쯤을 걷고 또 걸었으리라.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이 원주 치악산 밑의 어느 작은 암자였다. 탁발승은 그 곳의 어느 노장에게 나를 맡기며 \'예 있거라\' 한마디 남기고는 어디론가 떠나갔다. 노장 스님과 나이 든 두 분의 보살과 함께 살며 그 분들이 이것저것 시키는 일을 군 말없이 하며 지냈다. 밭을 메고 나무도 해 울 밑에 쌓아두기도 했다. 노장은 천수경을 한번쯤 새겨 주고는 일만 시켰다. 그렇게 이 년쯤 흘렀다. 집 생각, 형님 생각이 나고 노장의 끊임없는 잔소리와 노 보살들의 간섭을 못견뎌 신물이 날 즈음 탁발승이 바람처럼 나타나 내 이런 심경을 읽고는 \'철원 보개산 심원사로 가자\' 며 데리고 나섰다.
작은 암자에 있다가 심원사를 보니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크고 웅장했다. 무엇보다 천불을 모신 천불전의 불상들은 아직 불심 깊지 않은 열 다섯 어린 소년을 압도했다. 탁발승은 또 한 노장에게 나를 맡기며 \'잘 가르치십시오\' 하는 말 한마디 남기고 훌쩍 떠났다. 그 곳에서도 그저 천수경을 읽고 절하는 법이라든가 염불을 조금 익혔을 뿐 불교를 체계적으로 배우지는 못했다.
나는 마음이 울적하거나 고향 생각이라도 날 때면 석대암에 올라 기도를 하곤 했다. 석대암은 사냥꾼이 출가하여 창건한 절인데, 그 암자의 창건 설화가 자못 의미심장해 어린 마음에도 오래 남았다.
어느날 순석과 순득 두 사냥꾼은 금빛나는 멧돼지에게 활을 쏘았는데 멧돼지가 피를 흘리면서 보개산 관음봉 쪽으로 달아났다. 그 뒤를 쫓아 샘물이 있는 곳까지 가니 멧돼지는 보이지 않고 왼쪽 어깨에 화살이 꽂힌 지장보살석상만이 샘 속에 있는 게 아닌가. 이에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두 사람은 참회하고 출가하여 도를 이루었고 백 명의 제자와 함께 석대암을 창건하였다는 것이다.
겨울이 끝나갈 무렵, 노장이 불러 밖으로 칠하러 갈 준비를 하라고 일렀다. 노장은 각 절을 돌아다니며 바릿대 등을 옻칠 해 주곤 하는 분이었는데, 한번 절을 나서면 여러 날이 걸렸다. 짐을 짊어지고 이삼십 리 길을 걸어나와 두세 군데 들러 칠을 하고는 지금 내가 조실로 있는 봉선사에 들렀다.
봉선사는 그 당시 31본산의 하나로 교종 대본산으로 지정되어 교학진흥의 주역을 담당하고 있었고, 수십 칸이 넘어 보이는 절은 심원사에 댈 바가 아니었다. 월초 노스님이 맨 어른으로 계셨고 강사 스님, 스무 명이 넘는 강원생을 합쳐 대중 스님들이 마흔 명은 넘게 주석하고 있었다.
스님네들은 바릿대에 옻칠을 해 주는 노장을 도우며 봉선사에 사흘을 머물렀는데, 강원에서 공부를 하고 나오는 스님네들의 맑은 눈매며 조용 조용한 발걸음으로 경내를 부지런히 오고 가는 모습에서 나는 이 곳이 바로 내가 있어야할 곳임을 느꼈다.
\'기왕에 중이 될 바에야 이 곳에 있어야 겠다.\'
그렇게 결심하고 심원사로 갔다가 노장께 말씀도 안 드리고 봉선사로 왔다. 도망쳐 나온 셈이었다. 봉선사에 와서야 정식으로 대허스님을 은사 스님으로 모시게 되었다. 내 은사 스님은 월초 노스님의 손상좌로 키도 마춤 맞은데다 얼굴이 단정하고 온화해 보이는 분이었다. 염불하는 음성 또한 누가 들어도 신심이 일어날 만큼 듣기 좋았다.
\"그저, 신심을 가지고 공부 잘하고 중노릇 잘해라.\"
오나 가나 은사 스님께서 내게 들려준 말씀이다. 강사 스님께 초발심 자경문과 치문을 배우며 비로소 제대로 된 행자 생활을 한 셈이었는데, 공부를 하는 동안 솟아오르는 신심으로 대여섯 명의 행자들 가운데에서도 단연 \'모범생\'이었다. 은사 스님은 오며 가며 나를 앉혀 놓고 이런 저런 말씀을 하셨다.
\'오천 만사가 다 인연법이요, 인과법이라. 불법이란 이것만 분명히 알면 되느니라. 콩심은 데 콩나고 팥심은 데 팥나지만 콩을 심되 그냥 놔두면 안 된다. 불법으로 건사해야 하느니라. 마음을 잘 써야 하느니라.\'
은사 스님은 단청을 하는 분이었으나 내게 단청을 배울 것을 강요하지 않았고, 그저 좋은 중되야 한다는 말씀뿐이었다.
열두살에 집을 나와 탁발승을 따라 절집에 들어가 몇 년을 행자 아닌 행자생활을 하다가 봉선사에 와서야 비로소 행자다운 행자생활을 한 해하고, 열일곱이 되던 해 정월에 그 곳에서 계 받고 중이 되었으니 전생에 봉선사의 도량을 얼만큼 오고 갔을까. 올해로 내 나이 아흔, 그토록 오랜 세월이 흘렀으나 봉선사에서의 그 신심나고 풋풋했던 행자시절이 여전히 수묵화처럼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