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살이 되었을 때, 출가 본사인 내원사의 주지 임명장이 내려졌었다. 당치 않다고, 십 년 수좌 몸으로 아직 추어 낼 공부 더 남았다고 두 달을 버티다 종내는 인연을 따르기로 한 것이 소임살이의 시작이었다.
교구 본사인 통도사에서는 말사인 내원사의 임명장 수령이 지체되자, 차제에 비구 도량으로 바뀔 수도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자신에 이르러 그런 일을 당하는 형편까지 모르는 체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내원사는 비구 선방이었으나 그의 은사인 수옥스님이 육이오전쟁 때 잿더미가 된 그 곳을 중창한 뒤로 비구니 수행 도량이 된 곳이다. 그의 나이 스물세 살 적에 입산을 하니, 자광스님은 내원사를 본사로 삼은 첫 번째 비구니가 되었다. 그가 물리칠수 없었던 인연의 속 내용이 그러했다. 자신이 소임을 보던 십 년 동안,
이미 도량은 은사 스님에 의해 규모가 갖춰진 뒤여서이기도 했지만, 도량의 겉모양 꾸미기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던 듯하다. 정랑을 새로 짓거나, 전기선을 끌어 대는 등 그저 살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기본 시설을 하는 정도에 그쳤을 따름이다. 넓은 경내 부지에다 살림도 그 무렵 비구니 사찰로는 호가 나게 따뜻하였으니, 마음만 먹었다면 표나는 불사라도 벌일 수 있었을 텐데, 그제나 이제나 그런 일에는 큰 관심이 없다.
그러나 그가 소임을 보는 동안, 참여한 전 대중이 한사람의 탈락도 없이 모두 원만히 회향하기로는 비구니사 최초의 일인 삼년결사가 두 번이나 이루어졌다.
팔 년 전 이곳 보덕사로 온 뒤로도, 바트게 연이어지는 산자락에서 자라는 나무가 법당을 해칠 지경이어서 하는 수 없이 십 미터쯤 산을 깎아 내고, 그곳에서 나온 흙은 멀리 내다버릴 것 없이 도량 끄트머리에 쌓으니 저절로 도량이 넓어졌을 뿐이다. 그리고 법당 주위의 수맥을 찾아 대롱을 꽂으니, 장꽝 아래의 큰 물탱크를 채우고도 그 아래 수각으로 사철 물이 저절로 넘쳐 흐른다. 그저 사는 데 부족함이 없이 하는 것이 그의 불사 방식이고 규모이다. 자연 속에 자연스레 어울리는 절의 규모를 지킨다 함은 \"상식\"에 속할 일이겠으나, 으리으리한 불사가 지천으로 이루어지는 요즘에 와서는 \"귀한 미덕\"이 되어 버렸다. 내원사에서 첫 결사가 끝나자 교계 신문 및 일반 신문사에서 두루 큰 관심을 보였으나 \"내세우기 위한 공부가 아니었으므로\" 일절 불응하여 박대받은 기자들로부터 \"원성\"을 샀다.
그의 외호 방식을 엿보게 하는 일이었으나 자광스님은 \"외호는 무슨 외호!\" 하고 말을 자른다. 그런 일이 다른 데 아닌 내원사에서 가능했던 것은 삼년결사 동안 굳이 일주문 밖을 아쉬워할 일이 없도록, 뒷산인 천성산이 \"세상을 일주하는 길\"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천성산은 산세도 수려하려니와, 무엇보다 그 곳에는 원효스님이 화엄경을 설한 곳인 화엄벌이 있었기 때문이다. 꽃심처럼 한가운데 옹달샘 하나가 있고 , 가을이면 억새밭이 끝이 보이지 않게 넓게 펼쳐지는 곳이었다. 좌복 위에서 혹사당한 저린 발을 그 곳에서 풀면서, 너른 부처님 품, 자성 밝히는 길이 아득하기는 하나, 어렵고 험한 길인 만큼 더욱 매달려 볼 의미가 있는 길임을 다시금 확인하는 곳이었다.
세 번째 결사가 시작되는 것을 보고 그는 그 곳을 떠났다. 아무도 모르게 서류 해서 넣고, 신임자의 임명장이 나오자 그제사 대중에게 알리고 다시 선방으로 초총히 떠났다.
다시금 떠난 길이 어떤 길이었나. 속향인 강릉 근처의 산사에서 고시 공부를 하던 오랍을 찾아 약수로 위장병도 달랠 겸 그 곳을 들락거리다 스물세 살 나이로 출가를 했다. 교회에 열심일 때여서 뒷산으로 올라가 찬송가를 부르다 혼자 앉으면 하나님 붙들고 기도를 하곤 했는데 새벽 도량석 소리가 그의 마음을 붙들었다. 옥수수 수염 따는 울력을 하다가 마주 앉은 스님에게 말로는 이기고, 그가 풀어 보인 인과설에 가슴으로 졌다. 짧은 행자 기간을 끝내고 동학사, 탄헌스님, 관웅스님이 계시던 직지사, 그리고 성능스님이 계시던 개심사 등을 다니며 일곱 해 동안 간경을 했다. 일대 강백을 마음 나는 대로 찾아다니며 금강경도 사기私記까지 보고, 화엄경도 팔십 권을 모조리 보는 등 여한 없이 공부했다.
그러나 경봉스님에게서 받은 화두도 있었으려니와, 그것은 과정이라야 했다. 그래서 선방을 찾아 걸망을 쌌으니, 법희 노스님 계시던 서울 승가사로 시작해서, 범어사, 동화사, 수덕사 견성암, 해인사, 봉암사 등 한 철도 쉼 없이 좌복 위에 앉아 일대사에 부딪쳤다.
\"자기 정진이 일여一如한 사람도 외호길로 나서면 정진에 장애가 될 뿐만 아니라 지닌 덕까지 잃게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외호 소임도 누군가가 맡아 해야 할 일이지만, 자기 중노릇하기는.... 내원사 주지 노릇을 해도 절반쯤은 내 중노릇 할 수 있지 않을까, 첨에는 그런 생각 했었지요. 그러나 어림없는 일이었어요.
신심이 없고, 정진력이 없어서 그랬겠지마는....\"
깊은 산 속에 처한 곳도 아니건만, 맑은 산사의 풍취를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 보덕사는 그러나 사람의 탐욕과 그 욕심의 허망한 끝을 보여주는 역사가 깃든 곳이다. 지금부터 일백오십 년쯤 전인 1845년에 대원군은 두 대에 걸쳐 천자를 낸다는 가야산 동쪽의 명당을 탐하여, 그곳에 자리잡고 있던 가야사를 불태우고 금탑을 부순 뒤에 그의 선친인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였다. 그리고 고종이 임금의 자리에 오른 뒤에 가야골 아래에 그 은덕을 보답한다고 보덕사를 짓고 왕실의 원찰로 삼았다. 순리를 거스르는 어처구니 없는 과정도 그러했고, 두 대에 걸쳐 임금을 내기는 했으되 그것으로 왕조가 끝났으니 불운한 처지들로 역사에 적히게 된 두 임금을 낸 곳이 과연 \"명당\"의 이름에 합당한 것인지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하는 일이었다. 근세에 이르러서는 지척에 있는 수덕사의 만공스님과 그 제자들이 수행처로 삼았던 곳이기도 한 이곳에는 견성암과 보덕사에 오래 살았던, \'만공스님\'의 전법 제자인 법희 노스님의 부도탑과 부도비가 있다. 일본의 대학에서 수학을 한 뒤 상주 남장사 등에서 강백 노릇을 했던 그의 제자인 수옥스님이 육이오전쟁 뒤에 이 절을 새로이 중창한 뒤로 비구니 수행 도량이 되었으니, 말사인 처지이기는 하나 법희 문중의 원찰로 볼 만한 곳이다. 꼭 스무 해 전에 세상을 떠난 법희스님의 기일에는 제자들이 모두 모여 극진한 예를 갖춘다.
내원사를 떠난 뒤로 해인사와 봉암사를 다니며 밀쳐 두었던 공부를 갓 시작한 자광스님은 사단이 생겨 새 소임자가 필요했던 이 곳에 일 주일만 머물면 될 줄 알고 아무런 준비 없이 빈 몸으로 왔다. 그랬던 것이 이곳에서 팔 년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그는 이 곳에 와서 낮이면 농사를 짓고, 밤이면 두 번을 읽었으나 미진하기만한 화엄경을 읽었다. 결제 때는 스무 명이 넘는 대중이 방부를 들이는 선방은 일흔일곱 살의 나이가 믿기지 않게 정정하여 큰방에서 젊은 수좌들과 함께 좌복에 앉는, 법희스님과 함께 오래 살았던 보현스님이 맡아 하시게 하고, 그는 밭일에 매달렸다. 들깨, 콩, 고추, 호박, 땅콩, 녹두, 배추, 무 등 일은 지천으로 대중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원두 소임은 맡아 본적이 없던 그로서 힘에 부칠 만큼 밭일에 몰두하니 젊은 스님들이 그에게 말했다. \"스님, 낮에는 볕이 너무 따가우니 밭에 전기를 해 달아 밤에 일합시다!\" 좌복 위 일대사 정진만 수행이겠는가. 그는 아마도 한여름 뙤약볕에 후끈 달궈진 밭에서 올라오는 더운 땅김을 맡으며 한 생각 정리하는 생활을 했을 법하다.
올해도 들깨를 한 가마 반쯤이나 이미 거두었고, 끝물 고추도 다 따 손질이 끝났다. 겨울을 날 시금치와 삼동초는 진작 씨를 뿌려 두었으니, 웬만큼 자라야 겨울 추위를 견뎌 낼수 있기 때문이다. 한 철에 백 덩이쯤 따서 월동 양식으로 긴하게 쓰는 호박은 아직 누런 몸을 그대로 풀섶에 궁글리고 있었다.
바다가 가까운 이 곳은 산이 얕으니 하늘이 넓다. 골 깊은 산에서만 살아 예전에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일이었다. 달 없는 밤에는 별이 쏟아질 듯이 떠서 눈을 서늘하게 하고, 보름달은 그것대로 그 너른 하늘을 온전히 채운다. 문창으로 비쳐 드는 달빛에 이끌려 자광스님은 한밤중에도 곧잘 깨어나 도량을 서성인다. 그리고 햇중때부터 끼고 있는 게송 하나 외어본다.
내게 한 권의 경이 있으니
종이와 먹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어서
펴 보면 한 글자도 없으나
항상 광명을 비추는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