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않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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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공지영
1996년 11월 177호
자동차 운전 경력이 꽤 오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보지 않았던 모든 길에 대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다. 시내에 볼일을 보러 나갈 때에도 언제나 같은 길을 거쳐서 같은 신호등에서 좌회전, 우회전을 받아 간다. 처음 찾아가는 길을 갈 때는 지도를 펴고 열심히 줄을 그은 다음 그 길로만 달려간다. 어릴 때부터 모험심은커녕 집 앞 골목길에 리어커 에 실려 오던 놀이기구도 타보지 않았고 아이들 데리고 놀러간 길에 남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88열차도 타 본 적이 없다. 영화를 보러 갈 때에도 스릴이나, 모험 같은 카피가 있는 영화는 아예 나의 선택 사항에서 제외된다. 아마도 이런 행동 양식들은 내 존재 자체의 불안감과 낯선 것에 대한 나의 공포심에서 연유된 것이리라. 내가 이런 습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것은 이 세상에 대해 또는 사람들에 대해 신뢰가 부족한 때문은 아닐까 하고 어떤 스승은 내게 지적해주기도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은 가을날이었다. 나는 그 때 집안에 앉아 음악을 틀어 놓고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하늘은 수천 년 동안 감수성 예민한 사람들이 찬미했던대로 더 할 수 없을 정도로 푸르렀고 나뭇잎들은 아름다운 빛깔로 맑은 가을의 하늘 속에서 나풀거리고 있었다.
연휴동안 집에 쳐박혀 있던 내게 한 통의 전화도 걸려 오지 않았고 나 또한 그 북새통의 차들을 헤치고 어디로 가고 싶은 생각도 없던 터였지만 아름다운 그 날씨가, 그 하늘이, 그 나뭇잎의 빛깔과 모처럼 내가 가진 여유로운 시간이 내게는 한없이 아쉽게 생각되었다. 찬장에서 몇장의 CD를 꺼내 들고 나는 나도 모르게 집을 나서고 있었다.
길이 막힐 것도 두려웠고 갈 곳도 없다는 사실이 약간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나는 차를 출발시키며 생각했다. 어디로든 가보자. 어디로 가든 그 곳 역시 이 아름다운 이 가을 속일테니까.
차를 출발시키고 나서 늘 좌회전을 하던 곳에서는 우회전을 하고 늘 우회전을 하던 곳에서는 좌회전으로 핸들을 꺾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네 거리에 이르르면 그저 표지판 속의 마을 이름이 맘에 드는 곳으로 핸들을 돌렸다. 그 곳이 어디가 되든 내가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길로 가리라......라는 생각만 가지고 말이다. 그 길들에는 뜻밖의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가구공장과 무슨무슨 가든이라 불리우는 갈비집들과 그리고 묘지와 숲을 지나가고 있었다. 서울 쪽으로 돌아오는 차들은 한없이 꼬리를 물고 늘어져 있었고 내가 가는 방향 역시 그렇게 속도가 나지 않았지만 느긋했다. 음악을 틀어놓고 사람들을 둘러보는 여유까지 생각났으니까. 나의 목적은 이 낯선 길과 그리고 차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였으므로 차가 속도를 내든 그렇지 않든 나는 이미 목표지에 도달해 있는 셈이었다. 목적지를 향해 시계를 들여다보는 사람들과 나는 어느새 달라져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낯선 세상 속에 처음으로 인사를 건내며 달려갔다. 그러자 그 길의 끝에는 낯익은 강이 나타났다.
나는 우리집에서 강이 이토록 가까운 곳에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언제나 구리시나 미사리 쪽의 강변도로를 이용하여 강으로 나가곤 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 신기함을 만끽하며 달려나갔다. 차창 밖으로 낯익은 가을이 달려오고 있었고 그 가을 하늘이 잠긴 푸른 강 이 나를 따라 흐르고 있었다.
나는 한없이 한 방향으로 늘어선 차들을 피해 낯선 도로에 차를 세우고 보온병에 담아 가지고 간 차를 마셨다. 길가의 러브 호텔들의 커피숍 간판들도 있었지만 그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 차의 호젓한 맛이라니......
그렇게 강을 따라 달리다가 해가 질 무렵 집으로 돌아왔다. 오랜 만에 일기를 쓰고 싶은 기분이 들 정도로 맑게 개인 마음이 들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잠깐의 여유가 생길 때면 가끔 보온병에 따뜻한 녹차를 담고 몇 개의 CD를 꺼내 챙겨서 강변으로 나아간다. 멀리 낯선 길들을 따라가는 여행도 좋겠지만 사실 내게는 일상에 쫓겨 그런 여유가 주어지지 않으므로 요즘 이런 짧은 여행의 방식을 즐기고 있다. 때로, 집을 나서서 강에 도착하지 못하는 일도 있긴 하지만 그 길이 어디로 뻗어있든 그 길은 내게는 생애 처음의 길들이고 또한 나 자신을 따라 가는 그런 길들이기도 하다.
지나온 생의 긴 기간 동안을 나는 사람들을 부르고 기다리며 살아왔다. 내가 낯선 것들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 대상들은 한정되어 있긴 했지만 나는 한 번도 내 자신 속을 들여다볼 여유도 기회도 갖지 못하고 살아왔던 것이다. 이제 낯선 길들을 따라 나 자신을 만나는 여행을 당분간은 계속하고 싶다. 그리하여 이 깊은 가을날처럼 나의 마음이 투명하고 환해지는 어느 날 나는 아마도 오래도록 격조했던 친구들의 이름을 부르는 일도 있으리라. 투명해지고 환해진다는 것은 많은 것을 비워야 하는 일이므로 그제서야 내 벗들이 내 마음에 들어올 자리가 진정으로 생겨 날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