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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하늘은 무심無心 무념無念 무목적無目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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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정현웅 1996년 11월 177호
나는 소설을 집필할 때면 집을 떠나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는 습관이 있다. 이 습관은 내가 문학청년 시절에 집시처럼 방황을 하던 버릇이 그대로 이어져 내려온 일종의 자기 도피인지 모를 일이었다. 이것은 나에게 거의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고약한 버릇이었다. 그래서 결혼을 한 이후에도 그 방황은 중단되지 않았다. 결혼생활을 하려면 그러한 집시적인 방황은 그쳐야 하는 것이 옳았지만, 나는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던지고 사찰로 들어가 소설을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는 소설을 쓰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집에서나 직장에서는 소설이 되지 않았다. 이 갑작스런 사태는 나의 아내를 놀라게 했고, 최악의 상태로 몰고 갔다. 아내는 그 때 \'아이고, 잘못 시집을 왔구나\' 하고 한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나의 행위는 생존만큼이나 절실했다.
그렇다고 내가 소설가로서 확고한 기반을 가지고 있어서 지금처럼 글써서 먹고 살 형편도 되지 못했다. 얼마 뒤에, 아이에게 줄 우유 살 돈이 없다는 아내의 협박 때문에 다시 직장 생활을 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리고 가난하지만 전업 작가 생활을 고집하게 되었고, 그 때마다 나는 어디론가 훌쩍 떠나서 한적한 바닷가를 민박을 하든지, 산 속의 사찰을 찾아가서 글을 썼다.
그러다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자 경제적인 안정을 갖게 되고, 나는 깊은 산 속에 조그만 암자를 마련했다. 나는 그 곳을 글 방, 즉, 집필실이라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별장이라고 불렀다. 별장이든 집필실이든 나는 일 년이면 거의 반은 그 산 속의 집필실에 가서 지낸다.
그 집필실은 백 년 전쯤에 화전민이 살던 곳으로 지금은 부근에 아무것도 없다. 멀리 마을의 불빛이 보이기는 하지만 한주일 내내 있어도 사람을 구경할 수 없는 곳이다. 아마 산 속의 암자쯤으로 생각하면 분위기가 비슷할 것이다.
봄이나 가을에 이 곳에 있으면 자연의 오묘한 변화가 느껴진다. 봄이 되었을 경우 내가 있는 곳에 눈이 오면 저 아래에서는 비가 오고 있다. 꽃잎이 피기 시작하는 것은 아래 쪽부터 피어서 올라오고, 잎이 파랗게 돋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에 반해 가을이 되면 산봉우리에서부터 단풍이 들기 시작해서 밑으로 내려오는 것이 보인다. 그것은 마치 병풍을 두른 것같이 아름답다.
아침이면 숲에 오른다. 안개 숲에서는 새 울음소리가 난다. 삭삭거리는 소리에 사람인가? 하고 돌아보면 다람쥐가 잽싸게 달아난다. 산자락에는 뽀얗게 아침 이슬이 서려 있다. 길은 죽은 듯 고요하고 아침 바람은 춥도록 서늘하다. 사람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숲. 나의 존재를 성찰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나의 삶은 무엇이었던가. 생의 전환점은 언제였던가. 아직 오지 않은 것 같다. 그것은 어느날 갑자기 오지는 않을 것이다. 한때는 \"인생은 만들어가는 것\"이라 여기고 하루하루에 충실하리라 마음먹은 적이 있었다. 내일을 향해 간절하게 소망을 품고 태양의 눈부심에 다시 하루를 속아보던 때였다. 바둑판 같은 원고에 \'희망\' 이란 이름의 글자들을 촘촘하게 새겨나갔다. 나는 현실과 꿈을 오가면 애태우던 한여름의 풀벌레였다.
이순耳順을 바라보는 요즘에는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 마음을 비운다는 것이 얼마나 심신을 편안하게 하는지 실감하고 있다. 젊었을 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이것은 게으르다는 것, 의욕을 상실했다는 것 , 나태함과는 또 다른 의미다.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는 분들이야 이런 이야기가 새삼스럽지는 않으리라.
지난번 가을, 내가 집필실에서 머물고 있을 때의 일이다. 아마도 추석을 당겨서 성묘를 온 사람들 같았는데, 밖에서 한 아주머니가 불렀다. 그것도 스님하고 불렀다. 그래서 나는 문을 열고 머리를 내밀었다. 장발을 한 내 머리를 보여 주었는데도 그 아주머니는 나에게 말했다. \"스님, 삽을 좀 빌릴 수가 있어요?\" 그래서 나는 삽을 그녀에게 건네 주면서 말했다. \"아주머니, 나는 스님이 아닙니다.\" 그랬더니 그는 웃으면서 삽을 받아 갔다. 그리고 얼마 뒤에 그가 삽을 쓰고 가져 와서 나에게 주고는 두 손을 합장하더니 말했다. \"스님, 삽 잘 썼어요. 안녕히 계세요.\" 그래서 나도 합장을 하면서 \'아미타불\' 했다. 졸지에 중이된 나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지만, 한편 생각하면 그것은 환경적인 것뿐만이 아니라, 내 마음의 자세도 그렇게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속 깊은 집필실에 가면 나는 마음에 비워지고, 잡념이 없어진다. 물론, 소설을 쓰니까 그 구상에 젖겠지만 그것은 나 개인의 욕망과는 별개의 개념이었다. 마음을 비우고, 생각을 비우고, 욕망을 비운다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평안하게 하는지 알 수 없다. 그렇게 평상심을 가져야만이 소설을 제대로 쓸 수 있기에 내가 깊은 산 속을 찾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평상심을 얻기 위해서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