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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을 만나러 가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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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이혜경 1996년 11월 177호
여름 끝 무렵에 다시 산에 올랐습니다. 몇 년 전, 사람의 발길로 몸살 앓는 지리산에서 내려오며 나라도 산에 올라가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하고도 번번히 어기는 자신이 못내 마음에 걸렸지만, 다시 한 번 눈감아 주기로 했습니다.
어렸을 적 식목일 외에는 산에 풀씨한 낱 뿌려본 일 없는 저를, 산은 구절 초 환한 보랏빛을 펼치며 맞아 주었습니다. 산에서 살며 산의 일부가 된 나무며 벌레들도 제가 머물 만큼의 자리를 말없이 내어 주었습니다. 그들은, 사람 또한 그들과 같은 자연의 일부이므로, 함께 머물러야 한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자연속에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 자연의 순리를 좇아 머물다 가는 것임을 인정하지 않는 건 오직 사람뿐인 듯합니다.
도시를 벗어나니 비로소 도시에서의 삶이 보입니다. 사람이 왜 그토록 오만할 수밖에 없는지를 깨닫습니다. 도시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마다 사람 손을 거친 것이니 사람이 주인이라는 생각이 들 법도 합니다. 길가에 심어진 나무조차도 사람을 위하여 심어진 것이니까요.
거리의 화분대에는 꽃이 흐드러진 화분이 얹히지만, 꽃이 질 무렵이면 한꺼번에 사라지고 다른 꽃으로 대체되곤 합니다. 아마도 꽃이 질 때의 초라함을 시민들에게 보이지 않으려는 알뜰한 배려겠지요. 시드는 꽃이 썩 아름답지 않은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꽃망울은 꽃망울대로, 시든 꽃은 시든 대로 지켜보면서 그 순환을 깨달을 겨를 없이 거두절미 꽃만 내보였다 치우는 것, 그게 도시가 생명을 대접하는 방식입니다.
도시를 떠나오면 금세 깨닫게 됩니다. 미나리꽝 옆에 수줍게 핀 고마리며 너른 절마당을 기어가는 개미, 풀섶에서 날개를 비비며 울어대는 풀무치까지도, 누구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건 꿈에도 생각해 본 일 없다는 듯이 저 홀로 유유합니다. 숲길에 떨어진 도토리는 때가 되니 익었고 익었으니 떨어졌을 뿐입니다. 어쩌다 지나가던 다람쥐가 횡재를 하겠지만 그건 다람쥐의 행운일 뿐, 도토리가 다람쥐를 위해 익어 떨어진 것은 아닙니다.
풀잎에 가려질 만큼 작은 생명들이 산에서는 참 크게 보입니다. 법당 마루를 배밀이로 기어가는 민달팽이거나 산 안개가 자아내는 습기에 속아 나왔다가 볕 아래 온몸이 흙 범벅이 된 지렁이거나 어쩌다 뒤집힌 몸을 건사하지 못해 버둥거리는 노린재거나....... 무심한 사람의 발길이 닿기 쉬운 자리에서 풀 섶으로 그것들을 옮기다보면 확연히 깨닫습니다. 이 작은 몸피에 깃들인 목숨의 무게가, 이를 들어 옮기는 제 목숨의 무게와 더할 것도 없고 덜할 것도 없는 맞잡이 라는 걸.
그걸 다시금 깨달으면서 마음이 순해지고 동작이 느려집니다. 발자국 소리를 죽이며 느릿느릿 걷다보면 오래 저를 떠나 있던 침묵이 서늘하게 고이는 게 느껴지곤 합니다. 참 오랜만에 만나는 침묵입니다. 여행을 떠날 때 배낭 속에 넣어온 책은 단 두 권, 막스 피카르트가 쓴 「침묵에 관하여」와 일연의「삼국유사」이었습니다. 침묵 속으로 가라앉고 싶다는 마음과 이야기하고 싶다는 마음, 그 길항이 고스란히 드러난 선택입니다.
무뚝뚝하다 할 만큼 말수 적던 제가 말이 많아진 게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자기 속에 갇혀 있던 이십대를 벗어난 뒤, 남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던 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새를 깃들이는 나무 같은 사람이 되겠다고 터무니없는 욕심을 부리던 무렵.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거든답시고 자꾸 말을 하게 되었지요. 하염없이 말을 뱉어낸 속은 날로 여려졌습니다.
\'이대로는 안 되겠구나\' 라는 깨달음은 최근에야 찾아왔습니다. 정신대 할머니들이 모여 사는 \'나눔의 집\'에 갔을 때였지요. 그 모진 세월을 고스란히 치러낸 할머니들이 어찌 그리 고우시던지요. 생명의 강인함에 시리던 제 무른 가슴은 끝내, 지난 일을 말씀하시다 목메이는 할머니를 보고 나서 화장실로 달려가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밖으로 나와 하늘을 보는데 발 밑이 꺼지는 듯 아득해졌습니다. 아직 멀었구나. 이렇게 눈물부터 앞서 어룽거리는 눈으로 어찌 투명한 바닥을 볼 수 있을까... .
그리고 돌아와서 얼마 뒤, 제게 무언가를 묻는 이와 통화를 마치고 나서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혼자 말하는 저를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너무 말을 잘하는구나.... 자칫하면 말이 마음을 앞질러 나갈수도 있겠구나. 두려웠습니다. 그런데도 스스로 가누어지지 않아서, 염치없이 산의 힘에 기대려 떠났고, 산은 그 묵연함으로 저를 쉬게 해 주었습니다.
산에서 내려오기 전날엔 숲길을 오래 걸었습니다. 제가 피워낸 잎을 제 발치에 떨군 나무들. 고요히 썩어가는 그 잎들은 다시 나무를 키우는 거름이 되어 다음 해에 새 잎으로 피어나겠지요. 그 나무들의 겨울을 생각하며 \'겨울나무\' 라는 동요를 거듭 불렀습니다.
숲에서 나와 법당 앞에 서니 저만큼 앞, 겹겹인 능선 위에 막 벙그는 꽃봉오리처럼 오롯한 산봉우리가 보였습니다. 가야산 이라지요. 그리고 저 가야산엔 골프장이 들어서려 한다지요. 거기에 생각이 미치는 순간, 그때까지도 입 안에서 맴돌던 노래가 쑥 들어갔습니다.
숲 속에서 나무를 위해 부르는 제 노래로는 저 산의 아름드리 나무들이 잘려나가는 걸 막을 수 없습니다. 질펀한 눈물이며 마음 앞세운 말들은 슬픔을 잠시 다독일 순 있어도 명징함으로 나아가는 데에는 오히려 방해가 될 뿐입니다. 제 마음을 앞세워 남에게 한 말들이 거두절미하고 내민 화려한 꽃은 아니었나요. 이 삶의 바닥을 바라보아야 할 눈길을 오히려 엉뚱한 데로 끌어 당기지나 않았을까요.
숨탄 것들 앞에서 뭉클 앞에서 뭉클 앞서던 연민이며 감상을 냉정하게 거둬들이고, 잎다 떨궈진 나무처럼 혹독한 명징함에 한 번 이르러 보아야 하겠습니다. 소란스러운 말을 다 거둬들인 침묵 속에서 비로소, 타고난 대로 살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게 무엇인지 보이고, 그런 뒤에 어눌하게 말문이 트이겠지요. 여전히 묵묵한 나무의 튼실한 둥치를 눈에 담고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수그러진 가을볕처럼 이생의 한낮도 이미 기울어, 이 생을 닦을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은 듯합니다. 그리하여 이 가을, 산에서 내려온 지 여러 날이 지났지만 찬바람쯤 너끈히 견딜 때까지 저는 여전히 부재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