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법어 도림 법전스님


도림 법전스님

도림 법전스님의 법어 공간입니다.
동안거결제법어

사방으로부터 함께 모여들어
모두 무위의 법을 배운다
여기가 바로 부처를 뽑는시험장이니
마음을 비워야 급제하여 고향에 돌아가리라
(十方同共聚)
(個個學無爲)
(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

제목 : 쌀 한 톨 그리고 나무 한줄기 없으면서도 1998 년 6 월(196 호) 거룩하고 청정한 수행을 위한 법문
어선사회중於先師會中에 문유하과問有何過이니
합끽기등조合喫幾藤條이랴
향무인연처向無人煙處에 접대왕래接待往來컨댄
불축일립미不畜一粒米라.
스승의 회상에서 무슨 허물 있느냐고 물었으니
주장자를 몇 대나 맞아야 할까?
인적없는 곳에서 오가는 손님 맞겠다면서
쌀 한 톨도 쌓아두지 않았네 .

동산수초洞山守初스님이 운문문연雲門文備 선사회상에 참선 공부를 하러 왔습니다
운문스님이 물었습니다.
"어디에서 왔는가?"
"사도査渡라는 지방에서 왔습니다."
"여름안거는 어디에서 지냈는가?"
'호남땅의 보자사報慧寺에서 지냈습니다?"
"언제 그곳을 떠났는가?"
"8월 25일입니다."
"너는 몽둥이 석 대를 맞아야하겠다."
그러자 동산스님은 망연茫然히 물러나와 얼마뒤에 다시 물었습니다.
"지난번에 대답할 때 저의 허물을 보지 못하여 몽둥이를 맞았습니다만 아직도 사실은 마음을 밝히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운문스님은 매우 꾸짖으면서 말했습니다.
"이 밥통 같은 녀석아! 강서와 호남을오가며 그런 식으로 행각하며 다녔느냐?"
이 말에 동산수초스님은 크게 깨달았습니다.

아시다시피 동산스님은 삼세근 이라는 화두로 우리에게 더 알려져 있습니다. 동산수초스님에게 한 수행자가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스님은 "삼세근이나라."고 대답을 했던 '마삼근麻三斤' 화두의 주인공인 것입니다. 동산수초스님은 어릴 때부터 선근이 있었는지라 멀리서 범종소리가 듣려오는 것을 듣기만 하면 먹는 것도 잊어버려고 종일토록 똑바른 자세로 앉아 있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의 모친 역시 음식을 권하지도 않았고 또 일부러 어디에 있는가하고 찾지도 않았습니다. 열여섯살때 출가하여 강서의 마조스님 회상, 호남의 석두스님의 회상은 말할 것도 없고 온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정진을 하다가 운문스님에게 와서 참학을 하게 된 것입니다. 설렁설렁 제방을 돌아다녔는지 운문스님에게 '식대자食袋子' 곧 '밥을 눌러 넣는 자루' 곧 밥통이라는 욕지거리를 들어야했습니다.
이 동산삼돈방同山三頓棒 곧 운문스님에게 동산스님이 세 대의 몽둥이를 맞은 인연으로 깨침을 얻어 운문선사의 법을 잇게 되었던 것입니다. 삼돈방三頓棒은 '세 차례의 몽둥이'라는 말입니다. 이때 ‘돈頓’이라는 글자는 우리가 보통 ‘돈오頓惜’ 라고 할 때 사용하는 '갑자기’ ‘단박에’의 ‘돈頓’과는 모양이 같은 글자입니다만 뜻은 다릅니다.
여기에서는갯수를헤아리는수량을나타내는말입니다. 곧 '삼돈三頓'은 '세대’ 라는 말이 됩니다.

몽둥이 법문은 운문스님은 말할 것도 없고 여러 선사들이 즐겨 사용해 왔습니다. 대표적인 선지식이 아마 덕산선감德山宣鑑스님일 것입니다. 오죽하면 '덕산방德山棒’ 이라고 했겠습니까? 덕산스님은 학인을 지도할 때 자주 몽둥이를 휘둘렀습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그 가풍을 덕산방 이라고 하였습니다. 동산스님처럼 세 방망이가 아니라 주로 삼십 방망이었습니다. 말을 해도 삼집 방, 말을 하지 않아도 삼십 방이었던 것입니다.
신라에서 공부하러 간 스님이 덕산스님의 회상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덕산스님이 상당하여 말하였습니다.
"오늘 저녁엔 묻지 말라. 말을 거는 자는 삼십 방망이를 때리겠다."
이 때에 그 스님이 앞으로 나아가서 절을 하려는데 대사가 때렸습니다.
"저는 아직 아무 말도 묻지 않았는데 화장께서는 왜 때리십니까?"
"그대는 어디에서 왔는가?"
"신라국 사람입니다."
"그대가 신라에서 출발하려고 할 때 배에 오르기 전에 이미 삼십 방망이를 때렸어야 했다."

황벽희운黃廳希運스님도 몽둥이 법문을 통해서 임제스님의 눈을 열어 줍니다. 불법의 긴요한 뜻을 묻는 임제스님을 황벽스님은 다짜고짜 몽둥이로 두드려 패기를 세 번이나 하게 됩니다. 그래서 황벽스님과 인연이 없다고 생각한 임제스님은 대우大愚 선사를 찾아가게 됩니다.
"그대는 어디서 오는고?"
"황벽선사 회상에서 지내다가옵니다."
"황벽선사께서 무엇을 가르치던가?"
"제가 불법의 긴요한 뜻이 무엇인지를 세 번이나 물어 보았는데, 세 번 다 몽둥이만 실컷 얻어 맞았습니다. 도대체 저에게 무슨 허물이 있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대우 선사는 무릎을 치면서
"황벽 선사께서 그대를 위하여 혼선의 힘을 다해 가르쳤는데, 그대는 무엇 때문에 여기 와서 허물이 있는지 없는지를 묻는가?"
하면서 허허 웃는 것이었습니다. 웃는 소리에 임제스님은 그토록 의심하던 "황벽 육십 방"의 낙처落處를 알아차렸던 것입니다.

동산스님이 운문스님을 처음 만나 "어디서 왔는고?" 했을 때 사실 바로 일아듣고 한소리를 해야했습니다. 그런데도 '자도에서 왔습니다' 해 버렸던 것입니다. 운문스님은 하도 어이가 없어 다시 ‘여름철은 어디서 났느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눈치를 채지 못하고 “보자사에서 왔다”고 하였습니다. 계속 엉뚱한 소리를 해대니 마지막으로 “언제 떠났느냐?" 고 물었더녀 한술더 떠서 "8월 25일”이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그야말로 점입가경漸入佳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러한 잘못은 전혀 모르고 몽둥어 세 대만 억울했던 모양업니다. 꽤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그럴까? 하고 의심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간절함의 상태에서 내던진 운문스님의 한마디 가사실은 동잔스님의 눈을 열어준 것입니다.
삼돈방三頓棒으로 깨침을 얻은 동산수초스님은 이에 한마디 일렀습니다.

어중유어語中有語는 명위사구名爲死句요
어중무어語中無語는 명위활구名爲活句라.
언무전사言無展事요, 어불투기語不投機이니
승언자상乘言者喪이요, 대구자머對句者迷니라.
말 가운데에 말이 있는 것을 사구死句라고 하고
말 가운데 말이 없는 것을 활구活句라고 한다.
말은 일로 전개되지 못하고 말로는 기연에 부합되지 못하나
발에 의지히면 잃고 말에 얽매이면 어리석게 된다.

사실 지난 세상에서 서까래 하나, 기왓장 한조각, 죽 한그릇 보시한 인연의 복만으로도 하늘 세상과 인간 세상의 션지식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치를 분명히 알지 못하면 결국 어리석고 쓸모 없는 인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구게 속에서 분명한 것을 보아낼 수 있다면 초연한 납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동산수초스님처럼 해묵은 모자와 냄새 절은 장삼을 훌훌 내던져 버리고는 인적 없는 곳에다가 암자를 짓고, 쌀 한톨 쌓아두지 않고 나물 한줄기 심지 않고서도 사방에서 오가는 납자들을 맞이하면서, 그들의 마음에 박혀 있는 못과 말뚝을 뽑아 줄 수 있고, 냄새 나는 저고리와 찌들은 모자를 벗겨 줄 수 있어야하겠습니다.

삼돈방시타불회三頓棒時打不廻하니
철문중격쇄방개鐵門重擊 方開라.
감차불축일립미境R差不畜一粒米하고
십자노두접왕래十字路頭接往來로다.
세 대의 방망이를 휘두를 때는 때려도 돌아오지 않더니
무쇠대문을 거듭치니 고리가 겨우 열린다.
딱하구나! 쌀 한 톨도 쌓아두지 않고서
십자 네거리에서 사람들을 접대하네.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