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방으로부터 함께 모여들어
모두 무위의 법을 배운다
여기가 바로 부처를 뽑는시험장이니
마음을 비워야 급제하여 고향에 돌아가리라
(十方同共聚)
(個個學無爲)
(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
용아거둔龍牙居遯스님께서 처음 취미무학翠微無學 선사에게 참문하였습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판禪板을 나에게 건네 다오.”
스님께서 선판을 건네 주니 취미 선사는 받아들고서 바로 후려치니 얻어맞은 용아스님이 한마디 하였습니다.
“때리기는 마음대로 때리십시오마는 아직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은 없습니다.”
다시 임제 선사를 찾아갔습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나에게 포단蒲團을 건네 다오.”
스님께서 포단을 건네 주니 임제 선사는 받아들고서 바로 후려치니 또 얻어맞은 용아스님이 똑같이 한마디 하였습니다.
“때리기는 마음대로 때리십시오마는 아직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은 없습니다.”
선판은 오랜 시간에 걸쳐 좌선하고 난 뒤 피로할 때 나이드신 선사들이 휴식을 위하여 등에 기대고서 잠시 쉴 때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포단은 물론 좌복 곧 방석을 말합니다. 이 ‘용아서래 龍牙西來’ 공안의 주인공인 거둔스님은 곽郭씨 집안의 자손이며 강서성 무주撫州 사람입니다. 14세 되던 해 길주吉州 만전사滿田寺로 출가하였으며 육 년 뒤에 숭산崇山에서 구족계를 받았습니다. 제방을 다니다가 동산양개洞山良价스님에게 참학하여 그의 법을 이어받은 선사입니다.
취미 선사는 단하천연丹霞天然 선사의 법을 이어받고 취미산에 머물면서 종풍을 널리 선양하고 있었습니다. 임제 선사 역시 천하가 인정하는 대도인大道人입니다. 그래서 거둔스님이 같은 질문을 했을 때 두 선지식에게서 똑같은 대답이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옛사람은 한마디 한구절도 마구 쓰지 않았습니다. 어떤 계기를 만나 본분 소식을 알아차렸을 때는 어떻게 해야 옳겠습니까? 용아스님은 살아 있는 물을 피하고 스스로 썩은 물 속에서 살림살이를 하면서 한결같이 제 나름대로 견해를 지어서 ‘때리는 것이야 마음대로 때리십시오마는 그러나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은 없다“고 대답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자세히 살펴보면 비록 용아스님이 최고의 가르침인 선禪에 어둡지는 않았지만 이미 제1의제第一意諦가 아니라 제2의제第二義諦에 떨어져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 때 두 큰 스님께서 선판과 포단을 찾았을 때 용아스님은 그 의도를 알았어야 했습니다. 두 선지식은 용아스님이 가슴 속의 응어리져 있는 일을 풀어 주었으면 했으나 너무 고준한 방법을 사용한 까닭에 결국 용아스님이 알아듣지 못했다고 할 것입니다. 결국 공부란 선지식과 배우려는 사람의 시절인연이 맞아야 하는 것입니다. 축착합착築着蛤着이 되어야 합니다. 줄탁동시啐啄同時가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취미무학 선사에게 나아갔으나 계합하지 못하였고 임제의현에 이르러서도 계합하지 못하자 결국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이 동산양개 화상의 회상이었습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동산洞山의 물이 거꾸로 흐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너에게 일러 주겠다.”
이에 용아스님은 그 자리에서 활연대오豁然大悟하였던 것입니다.
뒷날 거둔 선사께서 용아산龍牙山 회상의 어른이 되었을 때 어떤 스님이 물었습니다.
“화상께서 행각할 때에 취미, 임제 두 존숙에게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을 물으셨다는데 두 존숙의 눈이 밝던가요?”
“밝기는 밝았으나 아직 조사서래祖師西來의 뜻이 없었도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돌거북이 말을 하거든 그대에게 말해 주겠다.”
“돌거북이 말을 합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돌거북이 너를 향하여 무어라고 하던가?”
이에 그 스님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스님은 또 물었습니다.
“혜명慧明스님이 대유령大庾嶺에서 육조 스님의 발우를 빼앗고자 하여 들어올리고자 해도 들리지 않았는데 이 때는 어찌해야 합니까?”
“육조 스님은 어떻게 가지고 갔는가?”
그 스님이 또 물었습니다.
“유마 거사가 손으로 세계를 떠받쳤다고 하는데 그러면 유마는 어디에 서 있는 것입니까?”
“그대는 유마가 손바닥으로 세계를 떠받쳤다고 생각하는가?”
안목이 열린 용아스님의 기봉機鋒은 이처럼 뛰어났고 시원시원 했습니다.
불법을 배우려는 사람은 부처님도 조사 스님도 모두 뚫고 지나가야 합니다. 불조를 모두 원수인 양 여겨야 비로소 공부할 자격이 있습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언제나 불조에게 속임만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불조가 사람을 속이려는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강과 호수가 비록 사람을 막으려는 마음은 없으나 사람들이 이로 인하여 지나가지 못하기 때문에 장애가 되는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불조께서는 비록 사람을 속이려는 마음이 전혀 없었으나 사람들이 뚫고 지나가지 못하므로 결국 속이게 된 것일 뿐입니다. 만약에 불조를 뚫고 지나간다면 공부인이 불조를 체득한 것이니 그래야만 비로소 향상인向上人과 같아져 불조를 제대로 모시는 것입니다. 불조를 뚫고 지나가지 못하고 그저 불조를 배우기만 한다면 만 겁을 지나도 깨달음을 얻을 시기가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불조의 속임을 받지 않겠습니까?
결국 스스로 깨치는 수밖에 다른 도리는 없는 것입니다.
깨치고 보면 도적이 빈방에 들어간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다시 그냥 나오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도라고 하는 것은 결국 딴 사람과 다르다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딴 사람과 다르다는 마음이 없음을 체득하면 비로소 도인인 것입니다. 하루종일 향 피우고 바루 씻는 일은 말할 것도 없고 일상의 모든 일들이 털끝만큼도 딴 사람과 다르다는 마음이 없고 사람을 속이려는 마음이 없어야 비로소 도인이라 할 것입니다. 만약 스스로 ‘얻었다’ 거나 ‘알았다’ 고 한다면 전혀 구제할 방법이 없습니다.
어떤 스님이 대매법상大梅法常 선사에게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하고 물으니, “서쪽에서 오신 뜻이 없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대매스님은 무엇 때문에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이 없다.” 라고 했겠습니까? 임제 선사와 취미스님은 잡을 줄만 알았지 놓을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그 때에 용아였더라면 두 선지식이 선판과 포단을 찾았을 때 번쩍 들어다가 정면으로 내던졌을 것입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 취미스님과 임제스님을 추켜세운 것이 될 뿐만 아니라 찾아가서 묻는 자기 자신까지도 저버리지 않는 대답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했더라면 애써 동산스님께 갈 수고까지도 덜 수 있었을 것입니다.
불맹초해장향상不萌草解藏香象하고
무저남능착활사無底藍能着活蛇로다
금일강호하장애今日江湖何障碍오
통방진도유선거通方津渡有船車로다.
싹트지 않는 풀이 코끼리를 숨길 줄 알고
밑 없는 광주리에 능히 살아 있는 뱀을 담는다.
오늘날 강호에 무엇이 걸리랴?
사방으로 통하는 나루터엔 배와 수레가 분주하구나.